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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약을 마중 나온 칫솔(걷는사람 시인선55)
저자 : 정덕재 ㅣ 출판사 : 걷는사람

2021.12.15 ㅣ 148p ㅣ ISBN-13 : 9791191262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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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도서 > 문학 > 시 > 한국시
걷는사람 시인선 55
정덕재 『치약을 마중 나온 칫솔』 출간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요지경 세상에서
혁명과 해학을 노래하는 평화의 파이터


걷는사람 시인선의 55번째 작품으로 정덕재 시인의 『치약을 마중 나온 칫솔』이 출간되었다. 199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정덕재의 다섯 번째 시집. 농담과 해학, 촌철살인의 입담이 주특기인 시인은 짐짓 능청스러운 태도로 현실 세계를 줄타기하는 광대처럼 건너간다. 아슬아슬함 속에서 신명을 발휘하는 힘이 시집에 담겨 있다.
그가 들여다보는 풍경은 우리가 사는 요지경의 축소판이라 떨떠름하면서도 반갑고 그러면서도 애잔하다. “코로나19 감염병 사태로 조문은 받지 않는다며/은행 계좌번호만 남겼다”는 현실 속에서도, “스스로 부고를 준비하는 노인만 남아 있다”는 한탄 속에서도 그는 “코다리찜이 맛있는/부여군 어느 장례식장에 가본 지 오래됐다”(「고향 사람이 죽었다는 부고」)고 중얼거리며 입맛을 다시는 중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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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1부 그녀 곁으로 모여들었다
인간의 구성물질
기둥에 부딪힌 관계
치약이 나오면
손을 씻었는지
두 개의 이응을 찾아서
솜사탕 이별
고향 사람이 죽었다는 부고
개가 죽었다는 부고
등화관제가 필요한 시간
철거
바람의 탄생
질식
흰수염 얼굴
56년 된 얼굴의 생일

2부 늘 돌아오잖아

타이밍
살아 있다
살아간다
노르웨이에 산다
이삿날
고체가 된 냄새
산만한 인간의 상상
뜀박질
오래된 부부
재활용품 구분하기
니트의 여름
처방전
늙은 남자
이어폰

3부 지금도 심장은 왼쪽에 있다
벌들의 전세방
위대한 나무
커튼을 열며
센서등을 보며
돋보기의 시간
한일자동펌프의 공헌
심장이 뛰던 시절
덧대어진 키스
일기예보
소와 송아지
그놈의 사이시옷
통증1
통증2
고라니의 봄

4부 지는 꽃 아래 피는 꽃 있어
보행자 자격증
연두가 초록에게
오래된 운동화
흔적
플랫폼에서 놀기
신용카드
여론조사 1
여론조사 2
라라미장원
그냥 여자
윤수일의 쓸쓸한 아파트
늙은 혁명가의 농담
신파조 윙크
좋았던 옛날
백일홍

해설
그만의 보폭으로 구현하는 혁명, 그리고 해학
―강병철(시인?소설가)


[본 문]

절반쯤 감긴 눈으로 치약을 짠다

군대에서 장기수 복역 같은 근무 중에
어느 날 아들은
치약을 짜는 순간 외로움이 밀려왔다고 했다

급하게 이를 닦고
공부 잘하는 학생과 공부 안 하는 학생은 학교에 간다
이를 닦고
비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아닌 사람은 공장에 간다
바쁜 사람은 사무실에서 이를 닦고 출장을 간다
시간이 많은 사람은
천천히 이를 닦고
같은 길을 세 번 왕복하는 산책을 한다

아침에 치약을 짜도
저녁에 이를 닦아도
절반쯤 감옥에서는 걸어갈 길이 없다

외로움은
혼자라서 오는 게 아니라
갈 길이 막힌
절벽처럼 다가오는 법

밖으로 나오는 치약은 외롭지 않다

외나무다리 칫솔 위로 미끄러지듯 누군가 걸어 나온다

치약이 세상에 나오면 적어도 한 사람은
마중을 간다
─「치약이 나오면」 전문

열여섯 살 담뱃잎을 말리는 비닐하우스에서
병삼이 아버지는 담배 피면 뼈가 삭는다고
길게 훈시를 했다
여든셋 세상을 떠나기 일주일 전까지
그는 담배 몇 모금씩 빨았고
끝내 뼈는 삭지 않았다
아내가 죽고 시름시름 앓다
읍내 장터에서 예순일곱 여인을 만나
기운을 차린 게 구 년 전이고
오 년 전 헤어진 문틈으로 울음이 새어 나왔다

백 세를 앞둔 노모는 이른 저녁 잠이 든다
달이 뜨는 날이나
칠흑으로 사람을 가려 주는 날이나
동네에는
스스로 부고를 준비하는 노인만 남아 있다

죽어 갈 사람들은 오래전 서울로 떠났고
고향에서 들려오는 부고는 줄어들어
코다리찜이 맛있는
부여군 어느 장례식장에 가 본 지 오래됐다
─「고향 사람이 죽었다는 부고」 부분

마스크에 익숙해진 후
알 듯 말 듯 가물거리는 얼굴에
멋쩍은 눈인사를 보냈고
보이지 않는 입과 보이는 눈은
서로 다른 표정을 지었다

시간이 지난 후
눈으로 전하는 얘기들이
100와트 전등으로 빛나기 시작했고
깊은 밤 눈에서 빛나는 등불이
어둠을 밝혀 나갔다

콧잔등 위 얼굴만 드러내는 시간이 길어지자
입에서 나오는 열 마디 중에
마스크를 뚫고 나오는 것은 한 마디뿐
뱉은 말을 다시 삼키느라
질식사로 숨지는 작가들이 늘어나고 있다
─「질식」 부분

재활용품 분리 배출하는 날
플라스틱과 비닐과 유리병을 나누어 버리는데
801호 남자가 묻는다
이건 비닐인가요

재질을 손으로 감별해 답을 했다
중국집 우동 그릇을 덮은 포장용 랩은
쓰레기봉투에 담아 버려야 해요

누가 봐도 비닐로 보이는데요
배출 기준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요

보이는 게 다 실체가 아니지요
당신이 모범시민으로 보이는 것처럼 말이죠
담배꽁초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모습을 보면
손가락으로 한두 번 튕겨 본 솜씨가 아니던데요

당신은 스토커인가요
포물선을 아는 걸 보면 중학교 이상 졸업을 했군요
담배를 끊은 것도 분명하고요

저는 당신의 이웃이에요
헛기침 한 번으로 집 안을 드나들던 시절이 그리운
안타까운 21세기 이웃이지요

재활용품 배출하는 날
버려야 할 게 많고
주워야 할 것도 많이 있지요
─「재활용품 구분하기-801호」 전문

소나기도 이런 소나기는 처음이네요

아스팔트 위 또르르 굴러가는 50원 동전을 줍다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잖아요
눈물이 그치지 않았어요
긴 장마도 이런 장마는 처음이네요
오십 년도 더 된 일인데 어제처럼 선명하네요
인공눈물 넣지 않아도 눈이 마르지 않을 거예요

남은 생 동안에 지금도 굴러가고 있는 동전을 쫓아갈게요
자주 잊고 있던 길 위에 눈물을 뿌려 줄게요
처방전 고마워요 인공눈물은 두고 갈게요
─「처방전-901호」 부분

날개를 펴고
꽃가루를 찾아다니기 전에
벌들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방을 옮겨 다닌다
벌들도 전셋값 걱정을 하는지
집을 옮길 때마다
부산스럽다
─「벌들의 전세방」 부분

리어카를 끌고 가는 할머니의 숨소리와
최루탄 터지는 소리와
흔들리지 말자는혁명의 노래와
공장 굴뚝의 연기와
갈아엎는 배추밭이 어울려
심장이 뛸 때가 있었다

3층 계단만 올라도
숨이 가쁘다
허리띠 한 칸 때문에
콩당거리는
심장의 체면은 온데간데없다
계단은 높고
박동은 초침보다 빠르다
─「심장이 뛰던 시절」 부분

심장은 왼편에 있지만 반 뼘 정도 좌우로 움직일 때가 있다

내 생애가 끝나도 흔적은 대대손손
중국집 플라스틱으로 남는다
─「흔적」 부분

지금도 혁명이 필요하냐는 질문에
전동드릴을 자유롭게 다룰 때쯤
해답을 말한다고 했다
나이가 들면 손목과 발목과
이음새의 안부를 먼저 챙기는 게
혁명의 길에 나서는 첫 번째 태도다
─「늙은 혁명가의 농담」 부분

오일장 좌판에서 다듬은 파 두 바구니 시들까
우산 하나 받쳐 놓은 할머니가
오이 가지 호박 부추 대파
쪽파 감자 양파 브로콜리 양배추
박스 열 개를 펼쳐 놓은 젊은 할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옛날이 좋았지 육십만 넘으면 죽었는데

의사 아들이 건물을 지었다고 자랑하던
나이 든 할아버지가 요양병원에 들어간 다음 날
석션은 언제 하냐고 묻자
찡그리며 기저귀를 갈던 나이 든 간병인이
물끄러미 바라본다

옛날이 좋았지 육십만 넘으면 죽었는데

고단하게 살다 보니
목숨줄이 더 모질어졌다며
송대관 노래처럼 해 뜰 날이 올 줄 알고
고단해도 견뎠더니
목숨줄만 모질어졌다며
그리운 옛날 숨 넘어갈 듯 긴 시조창을 부른다

옛날이 좋았지 육십만 넘으면 죽었는데
─「좋았던 옛날」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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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사람 시인선 55
정덕재 『치약을 마중 나온 칫솔』 출간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요지경 세상에서
혁명과 해학을 노래하는 평화의 파이터

걷는사람 시인선의 55번째 작품으로 정덕재 시인의 『치약을 마중 나온 칫솔』이 출간되었다. 199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정덕재의 다섯 번째 시집. 농담과 해학, 촌철살인의 입담이 주특기인 시인은 짐짓 능청스러운 태도로 현실 세계를 줄타기하는 광대처럼 건너간다. 아슬아슬함 속에서 신명을 발휘하는 힘이 시집에 담겨 있다.
그가 들여다보는 풍경은 우리가 사는 요지경의 축소판이라 떨떠름하면서도 반갑고 그러면서도 애잔하다. “코로나19 감염병 사태로 조문은 받지 않는다며/은행 계좌번호만 남겼다”는 현실 속에서도, “스스로 부고를 준비하는 노인만 남아 있다”는 한탄 속에서도 그는 “코다리찜이 맛있는/부여군 어느 장례식장에 가본 지 오래됐다”(「고향 사람이 죽었다는 부고」)고 중얼거리며 입맛을 다시는 중년이다.
시집에서는 자본주의의 축소판인 아파트에 사는 소시민의 일상이 여러 차례 중계된다. 꿈에서도 들릴 정도록 발차기 실력을 뽐내는 601호 악동들이 있는가 하면 매번 이상한 냄새의 근원지를 물으며 킁킁거리는 401호 이웃이 있고, 우동 그릇을 덮은 포장용 랩을 재활용 쓰레기로 오인하는 801호 이웃도 있다. 집집마다 이중창문을 달고 얼굴엔 마스크까지 쓰고 있지만 시인의 오감에 걸려든 군상의 면목은 고독하거나 쓸쓸하고 어쩌면 뻔뻔하기까지 해서 안쓰럽다. 그게 다름 아닌 우리 이웃이자 가족의 초상이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치약을 짜는 순간 외로움이 밀려왔다”는 군대 간 아들 얘기를 떠올리면서는 “외나무다리 칫솔 위로 미끄러지듯 누군가 걸어 나온다”며 “치약이 세상에 나오면 적어도 한 사람은/마중을 간다”(「치약이 나오면」)고 표현한다. ‘치약’이라는 단어를 누군가의 ‘손’이나 ‘사람’으로 바꾸어도 상관없을 것이다. ‘적어도 한 사람은 마중을 간다’는 것, 적어도 세상의 한 존재가 다른 한 존재를 맞이해 줄 것이라고 시인은 믿는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삶의 혁명은 일어나지 않겠느냐고 주창한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오늘의 현실은 암울하지만 그럼에도 웃음과 비유를 놓지 않으며 마음속 닫힌 문들을 하나둘 열어 놓게 하는 힘이 정덕재의 시에 있다.



추천사

정덕재 시의 매력은 딴청이다. 자질구레한 사람의 속내에 짐짓 무심한 척 적당한 거리를 둔다. 치약, 리모컨, 탁상달력이나 자전거에 눈을 주면서 슬쩍슬쩍 농담을 던지는 그의 시를 읽고 있으면 피시식 웃음이 난다. 우리 삶에 웃음만큼 큰 부조가 있을까? 딴청, 혹은 능청으로 표현되는 여유와 배려에 감염되어 슬프고 무거운 어느 하루도 너무 오래 슬프거나 외롭지 않게 건너갈 수 있을 것 같다. 남들이 흔히 쓰는 ‘이웃’보다 그가 쓰는 ‘201호’가 훨씬 정직하게 이웃답다. 201호, 302호, 401호인 나의 살림에 그의 시선이 와서 나도 모르게 머물곤 했다는 것을 시를 읽다 보면 알게 된다. 재미있고 속 깊은 사람, 그 시인에 그 시다.
최은숙 시인


시인의 말

누군가 마중을 나온다면 길이 외롭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낯선 사람이든 낯익은 사물이든.
2021년 11월
정덕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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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재
주로 부여?대전?계룡에 생활의 흔적을 남기고 있으며 199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 『비데의 꿈은 분수다』 『새벽안개를 파는 편의점』 『간밤에 나는 악인이었는지 모른다』, 정치 풍자 시집 『대통령은 굽은 길에 서라』, 청소년 시집 『나는 고딩 아빠다』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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